밀란 1세는 1854년 몰다비아에서 태어나 세르비아 공작(1868–1882)과 세르비아 국왕(1882–1889)을 역임했다. 그는 망명 중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미하일로 오브레노비치 3세의 암살로 인해 14세의 나이에 세르비아 공작위를 계승했다.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영향력 아래 통신 수단 개선과 천연 자원 개발에 힘썼으나, 1885년 불가리아와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개인적인 문제로 인해 1889년 왕위를 아들에게 물려주고 퇴위했다. 퇴위 후에는 군 총사령관으로 복귀하여 군사 시스템을 개선하는 데 기여했으나, 아들과의 불화로 인해 세르비아를 떠나 빈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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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은 밀로슈 오브레노비치 (1829–1861)와 그의 몰다비아 출신 아내 마리야 오브레노비치(본명 엘레나 마리아 카르타르지우, 1831–1879) 사이에서 태어났다. 밀란의 아버지인 밀로슈의 아버지인 예브렘 오브레노비치 (1790–1856)는 밀로슈 오브레노비치 1세 공작의 형제였다. 따라서 밀란은 밀로슈 공작의 조카손자였다. 그는 누이 토마니야라는 한 명의 형제만 있었다.
밀란이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부모는 이혼했다. 1861년 11월 20일, 7살의 밀란의 아버지 밀로슈는 부쿠레슈티 근처에서 오스만 제국과 싸우다 루마니아 육군의 외국인 용병으로 사망했다. 이로 인해 그의 어머니 마리야가 법적 양육권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마리야는 호화로운 귀족적인 생활을 했고, 곧 루마니아 통치자 알렉산드루 이온 쿠자의 정부가 되어 그에게 두 아들 알렉산드루 알. 이온 쿠자와 디미트리에를 낳았다. 그 결과 그녀는 밀로슈와의 이전 결혼에서 태어난 자녀들에게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따라서 젊은 밀란을 그의 사촌 미하일로 오브레노비치에게 법적으로 입양시키기로 합의했다. 미하일로는 그동안 카라조르제비치 왕조가 1858년 추방된 후 세르비아 공국으로 돌아와 1860년 통치 공작이 되었다.
2. 2. 세르비아로 오다
밀란은 크라구예바츠로 미하일로 오브레노비치 3세 공에 의해 데려와졌으며, 미하일로 3세는 어린 밀란을 키울 유모를 마련했다. 수십 년 후, 밀란이 왕이 되었을 때, 그의 어머니의 사생활에 대한 세부 사항은 그의 정치적 반대자들, 특히 인민 급진당(NRS) 지도자 스토얀 프로티치에 의해 자주 사용되었는데, 그는 심지어 자신의 신문인 ''사모우프라바''에서 밀란 왕의 아버지가 실제로는 알렉산드루 이온 쿠자이며, 밀란 왕을 오브레노비치 대신 쿠지치라고 비하하는 거짓 혐의를 제기하기까지 했다.
조카를 세르비아로 데려온 후, 미하일로 공은 또한 젊은 밀란의 교육을 돌보아 파리의 리세 루이르그랑으로 보냈는데, 그곳에서 젊은 밀란은 상당한 성숙함을 보였다고 한다.
3. 세르비아 공작 (1868–1882)
스테반 토도로비치가 그린 밀란 공의 초상화, 1881년
1868년 6월 10일, 밀란은 14세의 나이로 미하일로 오브레노비치 3세 공이 암살당하면서 세르비아 공작위를 계승했다. 미하일로 오브레노비치 3세에게는 남성 상속자가 없었기 때문에, 세르비아의 왕위 계승 문제는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암살 이후 혼란과 권력 공백 속에서, 일리야 가라사닌이 세르비아 정치계에 다시 등장했다. 그는 8개월 전 미하일로 오브레노비치 3세에 의해 세르비아 총리 자리에서 해임되었지만, 음모자들의 권력 장악을 막고 새로운 왕조를 세우기 위해 노력했다.
새로운 통치자는 대국민 의회에서 선출해야 한다는 정치적 합의가 있었으나, 각료 밀리보예 페트로비치 블라즈나바치는 군대를 장악하고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강화했다. 블라즈나바치가 밀란을 미하일로 공의 후계자로 제안하자, 가라사닌은 이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3. 1. 미하일로 오브레노비치 3세의 암살과 즉위
3. 2. 밀리보예 페트로비치 블라즈나바치의 섭정
밀란 1세는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섭정 위원회가 구성되어 밀란의 이름으로 섭정을 펼쳤다.[3] 섭정 위원회는 3인으로 구성되었는데, 정치가이자 역사가인 요반 리스티치(Jovan Ristić)와 부유한 상인 가문 출신의 정치가이자 역사가인 요반 가브릴로비치, 그리고 위원회를 이끈 블라즈나바츠였다.
어린 밀란은 파리에서 세르비아로 소환되어, 블라즈나바츠가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여 군대를 동원해 건물을 포위한 가운데 탑치데르 의회 앞에서 즉위했다.[3]두브로브니크 출신의 저명한 세르비아 푸치치 가문의 귀족인 메도 푸치치는 왕자의 교사이자 고문으로 베오그라드로 왔다.
블라즈나바츠의 개인적, 정치적 지도 아래, 왕자는 모든 국사에 대해 섭정 위원회의 수장에게 의존했다.[3] 밀란 왕자는 미하일로 공작의 광대한 재산이 미하일로의 누이인 페트리야와 사브카의 자녀들에게 돌아갔기 때문에, 부유한 가문으로부터 많은 유산을 물려받지 못하고 부채가 많았던 선친의 마라셰슈티 저택만을 물려받았다.[3]
1869년 1월 2일, 주로 리스티치의 작품인 세 번째 1869년 세르비아 헌법이 공포되었다.
1871년, 왕자는 두 차례의 사건에 직면했다. 5월에는 베오그라드 국립극장 건물에서 몇 백 미터 떨어진 테라지예에서 폭탄이 터졌으나,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이 사건은 세르비아 역사에서 테라지예 폭탄/Terazijska bombasr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세르비아에서는 젊은 왕자가 성년이 되어 블라즈나바츠에게 계속 의존하게 하려고 블라즈나바츠가 폭발을 조직했다는 추측이 있었다. 10월 6일에는 스메데레보를 방문했을 때 뒷간에 갔다가 변기 위의 나무 바닥이 부서져 구덩이에 빠졌으나, 경호원이 그를 구출했다. 이 사건은 스메데레보 가구 또는 스메데레보 세팅/Smederevski nameštajsr으로 알려져 있다.[4] 역사학자 슬로보단 요바노비치는 이 사건이 우연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지만,[4] 역사학자 레온티예 파블로비치는 공모자들이 나무 바닥에 질산을 뿌려 부식시켰다고 주장했다.[4]
세르비아-투르크 전쟁 (1876-1878) 동안 세르비아 군의 군복을 입은 밀란 오브레노비치 4세
3. 3. 성년이 되다
1872년 8월 22일, 밀란은 성년으로 선포되었고, 친정 체제를 시작했다. 그는 곧 뛰어난 지적 능력과 열정적이고 고집스러운 성격을 드러냈다. 유진 스킬러는 그를 매우 주목할 만하고, 특별히 지적이며 박식한 젊은이로 평가했다. 세르비아 공국은 여전히 형식적으로는 오스만 제국의 일부였지만, 실제로는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러시아 제국을 비롯한 다른 열강에 정치와 경제가 훨씬 더 의존하는 반독립 국가로 오랫동안 기능해 왔다. 밀란은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세르비아 내 지정학적 이해 관계 사이에서 신중하게 균형을 잡았으며, 전자에 신중하게 기울어졌다.
1875년 7월 보스니아 빌라예트에서 세르비아인들이 네베시네 외곽에서 세금 제도와 현지 베이 및 아가의 가혹한 처우에 항의하며 봉기를 시작하자, 밀란 공은 봉기를 비난하고 참여를 거부했다. 유럽 전역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카라조르제비치 가문은 이와는 다른 접근 방식을 취하며, 봉기를 조직하고 실행하는 데 참여했다. 페타르 카라조르제비치는 페타르 므르코니치라는 가명으로 싸우기 위해 헤르체고비나 지역으로 갔다. 봉기가 확대되어 헤르체고비나의 나머지 지역으로 확산되고 곧 보스니아 빌라예트 전체를 휩싸면서, 젊은 밀란 공에게 세르비아 형제들을 돕도록 국내 압력이 증가했다.
3. 4. 결혼
밀란 1세와 세르비아의 나탈리 여왕 그리고 알렉산다르 왕자
밀란은 1875년 베오그라드 성 미카엘 대성당에서 나탈리 케슈코와 결혼했다.[5] 나탈리는 러시아 제국군에서 대령으로 복무한 케슈코의 딸이었다.[3] 나탈리의 어머니는 스투르자 공주 출신으로, 밀란과 나탈리아는 증조부모를 공유하는 2촌 관계였다.[3] 이러한 관계 때문에 그들의 결혼은 베오그라드 대주교인 미하일로 요바노비치 대주교의 특별한 승인이 필요했지만,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3]
나탈리아와 밀란 사이에서 1876년에 아들 알렉산다르가 태어났지만, 그들의 관계는 처음부터 갈등을 겪었다.
3. 5. 세르비아-오스만 전쟁 (1876-1878)
밀란의 통치 하에서, 여론에 대한 존중으로 그의 개인적인 선호와는 반대로 제1차 세르비아-오스만 전쟁이 발발했다. 한편, 카라조르제비치의 주장자, 페타르는 자원병으로 세르비아를 위해 싸웠다.
세르비아의 터키 영토 침략 시도는 자예차르 동쪽에서 저지되었고, 터키군은 크냐제바츠의 전략적 세르비아 전초 기지를 파괴했다. 후퇴하는 세르비아군은 알렉시나츠에서 패배했다.
세르비아의 군사 상황이 절망적으로 되자 밀란 공은 열강의 개입을 요청했고, 오스만 제국은 휴전을 허용했지만, 델리그라드 사건 이후 무너졌다.
재개된 전투는 오스만 제국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고, 두니스가 함락된 후, 오스만군은 베오그라드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이 시점에서 러시아 제국 정부는 포르테에게 48시간 이내에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에 휴전을 허용하거나 러시아의 개입에 직면할 것을 요구하는 최후 통첩을 보냈다. 1876년 11월 1일에 2개월 동안 지속되는 휴전이 허용되었고, 이후 1877년 3월 1일까지 연장되었으며, 이 때 오스만 제국과 세르비아 왕국 간의 최종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현상 유지를 유지했다. 세르비아는 영토를 얻지 못했지만, 어떤 것도 양도하거나 전쟁 배상금을 지불하도록 강요받지 않았다.
세르비아-터키 전쟁 (1876–78)의 끝에, 유럽 열강은 포르테가 베를린 조약에서 세르비아의 독립을 인정하도록 유도했다.
4. 세르비아 국왕 (1882–1889)
1882년 3월 6일, 세르비아 공국은 왕국으로 선포되었고, 밀란은 세르비아의 국왕으로 즉위했다.[6]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영향력 아래에서 밀란 국왕은 통신 수단의 개선과 천연 자원 개발에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무모한 낭비로 인해 부당하게 증가한 이러한 비용은 과도한 세금 부과로 이어졌다. 이는 징병제 강화와 함께 밀란 국왕과 오스트리아 측의 인기를 떨어뜨렸다.
밀란의 정치적 어려움은 1885~1886년 불가리아와의 전쟁에서 세르비아가 패배하면서 더욱 심화되었다. 1885년 9월, 동루멜리아와 불가리아의 통합은 세르비아에서 광범위한 사회적 불안을 야기했다.[7] 밀란은 즉시 11월 15일 새롭게 형성된 불가리아에 전쟁을 선포했다. 짧고 결정적인 전투 끝에 세르비아군은 슬리브니차 전투와 피로트 전투에서 완전히 패배했다. 밀란의 왕좌는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직접적인 개입으로 간신히 지켜졌다. 이제 국내적인 어려움이 발생하여 빠르게 정치적 중요성을 띠게 되었다.
개인적인 삶에서 밀란은 결코 충실한 남편이 아니었다. 특히 제니 제롬(랜돌프 처칠 경의 부인이자 윈스턴 처칠의 어머니)을 비롯한 여러 여성과 염문을 뿌렸고, 나탈리야 여왕은 러시아에 대한 동정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886년, 개인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어울리지 않던 부부는 결혼 11년 만에 별거했다.
나탈리야는 왕국을 떠나 10살 된 알렉산데르 왕자(후에 알렉산데르 1세)를 데려갔다. 1888년 비스바덴에 머무는 동안 밀란 국왕은 왕세자를 되찾아 그를 교육하기 시작했다. 여왕의 항의에 대해 밀란은 베오그라드 대주교에게 상당한 압력을 가했고, 불법으로 무효화된 이혼을 성사시켰다. 이제 밀란 국왕은 상황을 장악한 것처럼 보였다.
1889년 1월 3일, 밀란은 1869년의 헌법보다 훨씬 더 자유로운 새로운 헌법을 채택했다. 두 달 후인 3월 6일, 34세의 밀란은 갑자기 왕위를 포기하고 12세의 아들에게 물려주었다. 이러한 조치에 대한 만족스러운 이유는 제시되지 않았다. 밀란은 개인 자격으로 파리에 정착했다.
2020년에는 밀란 국왕이 프랑스어로 쓴 여러 편의 편지가 발견되었다. 편지에서 세르비아의 밀란 1세는 아들에게 통치 방법을 조언하고, 당시 정치인, 예를 들어 니콜라 파시치 총리에 대한 비판적인 논평을 했다.[8]
4. 1. 통치와 정치적 어려움
1882년 3월 6일, 세르비아 공국은 왕국으로 선포되었고, 밀란은 세르비아의 국왕으로 즉위했다.[6] 밀란 국왕은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영향력 아래에서 통신 수단을 개선하고 천연 자원을 개발하는 데 힘썼다. 그러나 무모한 낭비로 인해 발생한 비용은 과도한 세금 부과로 이어졌고, 이는 징병제 강화와 함께 밀란 국왕과 오스트리아 측의 인기를 떨어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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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5년 9월, 동루멜리아와 불가리아의 통합은 세르비아에서 광범위한 사회적 불안을 야기했다.[7] 밀란은 11월 15일 불가리아에 전쟁을 선포했지만, 불가리아와의 전쟁에서 세르비아는 슬리브니차 전투와 피로트 전투에서 패배했다. 밀란의 왕좌는 오스트리아-헝가리의 개입으로 간신히 유지되었다.
밀란은 개인적인 삶에서 여러 여성과 염문을 뿌렸고, 특히 제니 제롬(랜돌프 처칠 경의 부인이자 윈스턴 처칠의 어머니)과의 관계가 있었다. 나탈리야 여왕은 러시아에 대한 동정심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1886년 부부는 결혼 11년 만에 별거했다. 나탈리야는 왕국을 떠나 아들 알렉산데르 왕자(후에 알렉산데르 1세)를 데려갔고, 1888년 밀란 국왕은 왕세자를 되찾아 교육하기 시작했다. 밀란 국왕은 베오그라드 대주교에게 압력을 가해 이혼을 성사시켰다.[6]
1889년 1월 3일, 밀란은 새로운 헌법을 채택했고, 두 달 후인 3월 6일, 34세의 나이로 갑자기 왕위를 아들에게 물려주고 퇴위했다. 밀란은 파리에 정착했다. 2020년에는 밀란 국왕이 프랑스어로 쓴 여러 편의 편지가 발견되었는데, 이 편지에서 밀란 1세는 아들에게 통치 방법을 조언하고 니콜라 파시치 총리 등 당시 정치인에 대한 비판적인 논평을 했다.[8]
4. 2. 개인적 삶과 이혼
밀란은 결코 충실한 남편이 아니었고, 제니 제롬(랜돌프 처칠 경의 부인이자 윈스턴 처칠의 어머니)을 비롯한 여러 여성과 염문을 뿌렸다.[6] 나탈리야 왕비는 러시아에 대한 동정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6] 1886년, 개인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어울리지 않던 부부는 결혼 11년 만에 별거했다.[6]
나탈리야는 왕국을 떠나 10살 된 아들 알렉산데르 왕자(후에 알렉산데르 1세)를 데려갔다.[6] 1888년 비스바덴에 머무는 동안 밀란은 왕세자를 되찾아 교육하기 시작했다.[6] 밀란은 베오그라드 대주교에게 상당한 압력을 가해 이혼을 성사시켰는데, 이는 불법으로 무효화되었다.[6]
4. 3. 퇴위
1885년 동루멜리아와 불가리아의 통합은 세르비아에서 광범위한 사회적 불안을 야기했다.[7] 밀란은 즉시 11월 15일 새롭게 형성된 불가리아에 전쟁을 선포했다. 불가리아와의 전쟁에서 세르비아가 패배하면서 밀란의 정치적 어려움은 더욱 심화되었다.[6] 짧고 결정적인 전투 끝에 세르비아군은 슬리브니차 전투와 피로트 전투에서 완전히 패배했다. 밀란의 왕좌는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직접적인 개입으로 간신히 지켜졌다.
개인적인 삶에서 밀란은 제니 제롬(랜돌프 처칠 경의 부인이자 윈스턴 처칠의 어머니)을 비롯한 여러 여성과 염문을 뿌렸고, 나탈리야 여왕은 러시아에 대한 동정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886년, 개인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어울리지 않던 부부는 결혼 11년 만에 별거했다. 나탈리야는 10살 된 알렉산데르 왕자(후에 알렉산데르 1세)를 데리고 왕국을 떠났다.[6] 1888년 비스바덴에 머무는 동안 밀란 국왕은 왕세자를 되찾아 그를 교육하기 시작했다. 밀란 국왕은 베오그라드 대주교에게 상당한 압력을 가해 이혼을 성사시켰다.
1889년 1월 3일, 밀란은 새로운 헌법을 채택했다.[6] 두 달 후인 3월 6일, 34세의 밀란은 갑자기 왕위를 포기하고 12세의 아들에게 물려주었다. 밀란은 개인 자격으로 파리에 정착했다.
2020년에는 밀란 국왕이 프랑스어로 쓴 여러 편의 편지가 발견되었다. 편지에서 세르비아의 밀란 1세는 아들에게 통치 방법을 조언하고, 당시 정치인, 예를 들어 니콜라 파시치 총리에 대한 비판적인 논평을 했다.[8]
5. 퇴위 이후의 역할
1891년 2월, 급진당 내각이 수립된 후 나탈리야 여왕과 전 미하일로 대주교가 베오그라드로 돌아오면서, 오스트리아의 영향력은 러시아에 밀리기 시작했다. 혁명에 대한 두려움과 밀란 1세의 귀환 가능성으로 인해 1891년 5월, 여왕은 추방되었고, 밀란 1세는 아들이 성년이 될 때까지 세르비아로 돌아오지 않는 조건으로 민간 목록에서 100만 프랑을 받았다.
1892년 3월, 밀란 1세는 모든 권리와 세르비아 국적까지 포기했다. 그러나 1893년 4월, 알렉산드르 1세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부를 장악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세르비아 정치는 혼란스러워졌고, 러시아의 영향력이 커졌다. 1894년 1월, 밀란 1세가 갑자기 베오그라드에 나타났고, 그의 아들은 그의 경험과 조언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크루셰돌 수도원에 있는 밀란 1세의 무덤.
4월 29일, 국왕 칙령에 의해 밀란 1세와 나탈리야는 왕실 가족의 일원으로서 지위를 회복했고, 표면적으로 화해했다. 5월 21일, 1869년 헌법이 복원되면서 밀란 1세는 아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비아리츠에 주로 거주하던 여왕은 4년 만인 1895년 5월 베오그라드로 돌아와 대중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고, 이에 밀란 1세는 다시 국외로 떠났다.
아들과 화해한 후, 밀란 1세는 1897년 세르비아로 돌아와 세르비아 왕립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이 직책에서 세르비아 군사 시스템을 개선하는 데 큰 성공을 거두는 등 생애 최고의 업적을 이루었다. 젊은 국왕과의 관계도 한동안 좋게 유지되었다. 세르비아 친민주당 야당은 젊은 국왕의 권위주의적 통치가 심화된 것에 대해 그를 비난했고, 1899년 7월 6일 (구력 6월 24일), 정교회 축일인 이반단 (세례 요한 탄생)에 급진당 당원이 그를 암살하려 했다.
그러나 부자간의 좋은 관계는 1900년 7월, 알렉산드르 1세가 드라가 마신과 결혼하면서 끊어졌다. 밀란 1세는 이 결혼에 반대하여 총사령관직을 사임했고, 알렉산드르는 이후 밀란 1세를 세르비아에서 추방했다. 밀란 1세는 세르비아를 떠나 카를로비 바리, 티미쇼아라를 거쳐 빈으로 은퇴했다. 1901년 2월 11일, 밀란 1세는 예기치 않게 사망했고, 크루셰돌 수도원에 묻혔다.
5. 1. 세르비아 왕립군 총사령관 복귀
1891년 2월, 급진당 내각이 수립된 후 나탈리야 여왕과 전 미하일로 대주교가 베오그라드로 돌아오면서, 오스트리아의 영향력은 러시아에 밀리기 시작했다. 혁명에 대한 두려움과 밀란 1세의 귀환 가능성으로 인해 1891년 5월, 여왕은 추방되었고, 밀란 1세는 아들이 성년이 될 때까지 세르비아로 돌아오지 않는 조건으로 민간 목록에서 100만 프랑을 받았다.
1892년 3월, 밀란 1세는 모든 권리와 세르비아 국적까지 포기했다. 그러나 1893년 4월, 알렉산드르 1세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부를 장악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세르비아 정치는 혼란스러워졌고, 러시아의 영향력이 커졌다. 1894년 1월, 밀란 1세가 갑자기 베오그라드에 나타났고, 그의 아들은 그의 경험과 조언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4월 29일, 국왕 칙령에 의해 밀란 1세와 나탈리야는 왕실 가족의 일원으로서 지위를 회복했고, 표면적으로 화해했다. 5월 21일, 1869년 헌법이 복원되면서 밀란 1세는 아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비아리츠에 주로 거주하던 여왕은 4년 만인 1895년 5월 베오그라드로 돌아와 대중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고, 이에 밀란 1세는 다시 국외로 떠났다.
아들과 화해한 후, 밀란 1세는 1897년 세르비아로 돌아와 세르비아 왕립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이 직책에서 세르비아 군사 시스템을 개선하는 데 큰 성공을 거두는 등 생애 최고의 업적을 이루었다. 젊은 국왕과의 관계도 한동안 좋게 유지되었다. 세르비아 친민주당 야당은 젊은 국왕의 권위주의적 통치가 심화된 것에 대해 그를 비난했고, 1899년 7월 6일 (구력 6월 24일), 정교회 축일인 이반단 (세례 요한 탄생)에 급진당 당원이 그를 암살하려 했다.
그러나 부자간의 좋은 관계는 1900년 7월, 알렉산드르 1세가 드라가 마신과 결혼하면서 끊어졌다. 밀란 1세는 이 결혼에 반대하여 총사령관직을 사임했고, 알렉산드르는 이후 밀란 1세를 세르비아에서 추방했다. 밀란 1세는 세르비아를 떠나 카를로비 바리, 티미쇼아라를 거쳐 빈으로 은퇴했다. 1901년 2월 11일, 밀란 1세는 예기치 않게 사망했고, 크루셰돌 수도원에 묻혔다.
6. 죽음
1891년 2월, 급진당 내각이 수립된 후, 나탈리야 여왕과 전 미하일로 대주교가 베오그라드로 돌아왔고, 오스트리아의 영향력은 러시아에 밀리기 시작했다. 혁명에 대한 두려움과 밀란 1세의 귀환 가능성으로 인해 1891년 5월, 여왕은 추방되었고, 밀란 1세는 아들이 성년이 될 때까지 세르비아로 돌아오지 않는 조건으로 민간 목록에서 100만 프랑을 받았다.
1892년 3월, 밀란 1세는 모든 권리와 세르비아 국적까지 포기했다. 그러나 1893년 4월, 젊은 알렉산드르 1세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부를 장악하면서 상황이 변했다. 1894년 1월, 밀란 1세가 갑자기 베오그라드에 나타났고, 그의 아들은 그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4월 29일, 국왕 칙령에 의해 밀란 1세와 나탈리야는 왕실 가족의 일원으로서 지위를 회복했고, 표면적으로 화해했다. 5월 21일, 1869년 헌법이 복원되었고, 밀란 1세는 아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주로 비아리츠에 거주했던 여왕은 4년 만인 1895년 5월 베오그라드로 돌아왔고, 대중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이에 밀란 1세는 다시 국외로 떠났다.
아들과 화해한 후, 밀란 1세는 1897년 세르비아로 돌아와 세르비아 왕립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세르비아 군사 시스템을 개선하는 데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세르비아 친민주당 야당은 젊은 국왕의 권위주의적 통치가 심화된 것에 대해 그를 비난했고, 급진당 당원은 1899년 7월 6일 (구력 6월 24일), 정교회 축일인 이반단 (세례 요한 탄생)에 그를 암살하려 했다.
1900년 7월, 알렉산드르 1세가 드라가 마신과 결혼하면서 부자간의 관계는 끊어졌다. 밀란 1세는 이 결혼에 반대하여 총사령관직을 사임했고, 알렉산드르는 이후 밀란 1세를 세르비아에서 추방했다. 밀란 1세는 세르비아를 떠나 카를로비 바리, 티미쇼아라를 거쳐 빈으로 은퇴했다. 1901년 2월 11일, 밀란 1세는 예기치 않게 사망했다. 그는 밀로스 공의 부인이자 그의 고모 할머니인 류비차 공주 옆 크루셰돌 수도원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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